솔직히 저는 《리미트》를 보기 전까지 이정현이 '생활감 있는 경찰'을 연기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동 유괴를 소재로 한 범죄 스릴러라는 정보만 알고 들어갔다가,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절박한 감정에 끌려다녔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긴장감보다 답답함이 더 크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진짜 힘이었습니다. 모성애가 범죄 수사를 집어삼킨 순간《리미트》는 아동 연쇄 유괴사건을 중심에 놓은 범죄 스릴러입니다. 생활안전과 경찰 소원은 피해자 엄마 연주의 현장 대역(Decoy Operation)으로 수사에 투입됩니다. 여기서 현장 대역이란 실제 피해자 가족 대신 경찰이 신분을 숨기고 범인과 직접 접촉하는 수사 기법을 말합니다. 소원에게는 과거 동일한 작전..
SF 영화는 대개 거대한 폭발과 영웅적인 전투로 기억에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기 전까지는요. 우주 한복판에서 혼자 눈을 뜬 남자의 이야기인데, 정작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전혀 다른 종족 둘이 서로의 언어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SF 블록버스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평가가 절반쯤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상실로 시작하는 이야기, 예상과 달랐던 도입부SF 영화의 도입부는 보통 거대한 위기를 바로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폭발이 터지거나, 적이 나타나거나, 긴박한 브리핑 장면으로 시작하죠. 제 경험상 그래서 첫 장면을 보면 영화의 톤이 대부분 예측이 됩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달랐습니다. 주인공 라이언드 그레이스는 차가운..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존 카터》를 처음 틀었을 때만 해도 그냥 망한 블록버스터 하나 때우는 기분이었는데, 다 보고 나니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자꾸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1912년에 쓰인 소설이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SF 설정의 뿌리 같은 작품이 이렇게 늦게 도착했다는 게 묘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고전 SF의 원형, 바르숨이라는 세계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였습니다. 공주를 둘러싼 두 세력의 전쟁, 다른 행성으로 넘어간 지구인 영웅, 원주민 부족과의 동맹.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건 《스타워즈》보다도, 《아바타》보다도 훨씬 앞선 시대입니다.원작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Edga..
기억을 잃으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게 뭘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게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언컨셔스》는 사고로 모든 기억을 잃은 남자가 자신을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와 한 집에 갇히면서 벌어지는 심리스릴러입니다. 케이트 보스워스의 냉정한 연기와 밀폐된 공간이 만들어내는 압박감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기억상실이 공포가 되는 순간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눈을 떴는데 낯선 여자가 당신 아내라고 한다면, 처음에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컨셔스》가 만들어내는 공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귀신도, 괴물도 아닌 '내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협이 됩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83번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차 앞유리에 머리를 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 《강릉》을 보기 전에는 그냥 조폭 액션 영화겠거니 했는데, 막상 보고 나서 머릿속에 남은 건 주먹이 아니라 '낭만'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유오성과 장혁이 만들어낸 두 남자의 충돌은 단순한 세력 싸움이 아니라, 한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래된 한국형 누아르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그 안에서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지는 영화입니다. 유오성 vs 장혁, 두 캐릭터의 구조적 대립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집중하게 된 건 액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길석과 민석이 같은 화면에 앉아 말을 주고받는 장면들이 오히려 더 긴장됐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인물이라는 게, 대사보다 눈빛과 태도에서 먼저 읽혔습니다. 유오성이 연기한 길석은..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그냥 평범한 킬러 액션물로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건 화려한 총격전이 아니라 안나라는 인물 하나였습니다. 매기 큐, 사무엘 L. 잭슨, 마이클 키튼이라는 조합은 분명히 매력적인데, 영화가 그 재료를 끝까지 소화했는지는 좀 다른 문제였습니다. 킬링 카인드가 선택한 캐릭터 설계 방식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생각은 "설정 자체는 꽤 잘 쌓았구나"였습니다. 어린 시절 베트남에서 가족을 잃고 전설적인 암살자 무디에게 거두어진 안나, 수십 년이 흘러 세계 최고 수준의 청부살인업자가 된 그녀가 스승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안나와 무디의 관계가 단순한 사제 관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걸 영화계 용어로 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