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인구의 99%가 바이러스로 사망한 세계. 저는 이 설정을 보고 당연히 거대한 문명 붕괴 드라마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라스트 맨 다운》은 처음부터 그 기대를 조용히 무시합니다.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영화의 시선은 오직 한 남자의 오두막 앞마당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전부이면서, 동시에 의외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세계, 그런데 왜 카메라는 숲 속만 비추는 걸까요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의 내용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쉽게 말해 전쟁, 전염병, 재난 따위로 기존 사회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뒤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매드 맥스》나 《더 로드》처럼 폐허가 된 세상을 광활하게 담아내는 작품들이 이 장르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라스트 맨 다운..
솔직히 이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보스》라는 제목을 보고 당연히 권력 다툼과 배신이 넘치는 조폭 영화를 떠올렸는데, 막상 영화관에서 마주한 건 그 정반대였습니다. 보스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거든요.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이유가 뭔지, 직접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됐습니다. 아무도 보스가 되고 싶지 않은 조직, 이 설정 하나가 전부다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설정 하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게 가능하구나"였습니다. 보통 조폭 영화라면 보스 자리를 놓고 서로 싸우는, 즉 조직 내에서 차기 우두머리를 두고 세력이 충돌하는 구조가 긴장감의 원천이 됩니다. 조폭 영화에서는 대개 피와 배신이 따라붙는 장면들로 표..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악한 사람은 처음부터 눈에 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딘가 이상하고, 말이 앞뒤가 안 맞고, 주변 사람들이 다 꺼려하는 그런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악의 도시》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오히려 말이 너무 잘 통하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꽤 불편하게 보여줍니다. 친절한 얼굴 뒤에 숨은 소시오패스, 선의라는 인물영선의가 무서운 건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유정이 그를 의심하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됐습니다. 저 역시 초반에는 몇 번이나 “정말 저 사람이 범인인가?” 하고..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저는 이 영화를 그냥 스콧 앳킨스 액션 모음집 정도로 생각하고 틀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싸움 장면이 아니라 크리스라는 남자가 오래전에 한 약속 한마디였습니다. 납치로 시작하는 영화가 결국 아버지 이야기로 끝난다는 게, 생각보다 꽤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납치범처럼 보였던 남자, 크리스 체이니의 진짜 정체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든 의문은 딱 하나였습니다. "저 사람,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주인공 크리스 체이니는 출소한 전과자입니다.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콜롬비아로 날아가서 갱단 두목의 딸 엘리사를 데리고 도망칩니다. 겉으로만 보면 명백한 납치 장면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행동을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부러 관객이 크리스..
영화관을 나오면서 제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뭔지 아십니까. 휴대폰을 집어 들다가 그냥 내려놨습니다. 방금 본 것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댓글부대》는 댓글을 조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저 자신이 평소에 인터넷을 어떻게 소비해왔는지를 정면으로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보고 나서 찝찝한 영화가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댓글부대》인터넷에서 내가 화낸 것들, 혹시 누군가 만들어낸 것 아닐까솔직히 말하면, 저도 댓글 몇 개를 읽고 사람을 판단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기사보다 댓글을 먼저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고, 비슷한 반응이 수백 개 달려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들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로 받아들였습니다. 《댓글부대》는 바로 그 무..
솔직히 저는 《젠틀맨》을 보기 전까지 주지훈과 박성웅이 나오는 영화라면 당연히 무게감 있는 범죄 스릴러일 거라 단정했습니다. 근데 막상 틀렸습니다. 2022년 12월 개봉한 김경원 감독의 이 작품은 흥신소 사장 지현수가 검사 행세를 하며 로펌 대표 권도훈의 거대한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인데, 생각보다 훨씬 가볍고 통쾌하게 흘러갑니다. 무겁게 눌리는 대신 보는 내내 다음 장면이 궁금해지는 영화였습니다. 주지훈과 박성웅,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성한 《젠틀맨》의 두 얼굴주지훈이 연기한 지현수는 위기 상황에서도 쉽게 당황하지 않는 흥신소 사장입니다. 검사 사칭이라는 황당한 일을 벌이면서도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풀어나갑니다. 반면 권도훈은 정반대입니다. 큰소리를 치거나 과하게 위협하지 않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