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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악한 사람은 처음부터 눈에 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딘가 이상하고, 말이 앞뒤가 안 맞고, 주변 사람들이 다 꺼려하는 그런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악의 도시》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완전히 흔들렸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오히려 말이 너무 잘 통하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꽤 불편하게 보여줍니다.

친절한 얼굴 뒤에 숨은 소시오패스, 선의라는 인물
영선의가 무서운 건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을 골라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유정이 그를 의심하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됐습니다. 저 역시 초반에는 몇 번이나 “정말 저 사람이 범인인가?” 하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선의는 상대의 신뢰를 얻은 뒤 그 믿음을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유정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고, 그녀가 스스로 자신의 기억과 판단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흔히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르는 심리적 조작이 영화 속에서 상당히 불편하게 묘사되는 부분입니다.
제가 가장 답답했던 건 유정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 감정을 계속 눌러버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니 그게 단순히 답답한 행동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이미 믿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 사람을 의심하는 일이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의의 가장 무서운 점은 특별히 악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범한 얼굴로 다가와 신뢰를 얻고, 그 신뢰가 만들어낸 틈을 이용한다는 것. 저는 《악의 도시》가 이 부분을 꽤 현실적으로 보여줬다고 느꼈습니다.
선의를 믿는 유정과 의심하는 강수, 둘 다 한계가 있었다
한채영이 연기한 유정을 보면서 처음에는 솔직히 답답했습니다. "왜 저 사람을 믿지? 왜 저 상황에서 경계를 안 하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답답함이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저 상황에 있었다면 과연 달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유정은 인간의 선의를 믿는 사람입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면 그 마음이 어느 정도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실 아주 보편적인 사람이에요. 그 마음 자체는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선한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유정은 선의를 의심해야 할 시점을 계속 놓칩니다. 자신이 블랙아웃(Blackout) 상태가 됐다는 사실, 즉 음주 후 일정 시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를 겪고 나서도 선의의 설명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정말 보기 힘들었습니다.
장의수가 연기한 강수는 반대입니다. 사람을 쉽게 믿지 않고, 선의에게서 풍기는 꺼림칙한 분위기를 처음부터 감지합니다. 영화에서 강수는 유정의 동생 같은 조력자 역할을 하면서, 선의의 본모습을 눈치채고 경고하려 합니다. 처음에는 강수의 그런 태도가 조금 예민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제 경험상 이런 사람이 주변에 한 명쯤 있으면 실제로 든든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흥미로운 지점인데, 강수도 유정을 완전히 지켜내지 못합니다. 이미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흘러간 뒤에 도착하는 장면은 상당히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경계심이 강한 사람도 상대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감추고 접근하면 모든 위험을 미리 막을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요.
데이트 폭력(Dating Violence)이나 스토킹 범죄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을 늦게 인식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지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출처: 경찰청에 따르면 스토킹 범죄는 2021년 스토킹처벌법 시행 이후 신고 건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피해자가 가해자와 친분 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영화가 유정과 강수 두 사람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이런 것 같았습니다. 무조건 믿는 것도,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도 완전한 답이 아니라는 것.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안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신호가 반복적으로 울릴 때, 그것을 자꾸 억누르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오래 남은 감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결론
《악의 도시》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는다는 행위가 생각보다 훨씬 신중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누군가 너무 완벽하게 내 편인 것처럼 느껴질 때는 그 친절 뒤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쯤 가만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엄청난 반전이나 폭발적인 액션을 기대하고 보면 다소 조용한 영화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의라는 인물을 통해 신뢰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가스라이팅과 스토킹이 얼마나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도 시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꽤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악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티가 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생각이 가장 먼저 흔들렸습니다. 오히려 잘 웃고, 내 말을 잘 들어주고, 나를 누구보다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가장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선의라는 인물이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악한 사람은 반드시 악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악의 도시》가 가장 불편하게 남긴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