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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인구의 99%가 바이러스로 사망한 세계. 저는 이 설정을 보고 당연히 거대한 문명 붕괴 드라마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라스트 맨 다운》은 처음부터 그 기대를 조용히 무시합니다.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영화의 시선은 오직 한 남자의 오두막 앞마당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전부이면서, 동시에 의외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세계, 그런데 왜 카메라는 숲 속만 비추는 걸까요
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의 내용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쉽게 말해 전쟁, 전염병, 재난 따위로 기존 사회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뒤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매드 맥스》나 《더 로드》처럼 폐허가 된 세상을 광활하게 담아내는 작품들이 이 장르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라스트 맨 다운》은 그 공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유럽 인구의 99%가 사망했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카메라는 줄곧 북유럽의 눈 덮인 숲과 작은 오두막 주변에만 머뭅니다. 처음에 이 선택이 저는 솔직히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이 이 정도로 무너졌다면, 그 이후를 보여주는 장면이 더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 선택이 의도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직 특수부대원 존 우드는 3년 전 아내를 잃은 뒤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고 고립 생활을 선택합니다. 그에게 문명의 붕괴는 이미 끝난 사건이고, 그의 세계는 오두막과 숲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카메라가 좁은 공간에 머무는 것은 존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방식이었던 셈입니다.
존에게 중요한 건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숲 속 오두막에 홀로 남은 그는 살아 있다기보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생기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겁니다. 만약 마리아가 그 오두막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존은 아마 그곳에서 계속 혼자 지내며 조금씩 자신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존에게 마리아의 등장은 단순히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는 순간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이유를 찾게 되는 계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라스트 맨 다운》다니엘 스티센, 싸우는 게 아니라 치워버립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다니엘 스티센이라는 배우였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전직 군인이자 보디빌더 경력을 가진 배우로, 그의 체격 자체가 캐릭터의 설득력을 만들어냅니다. 존 우드가 혼자 숲에서 3년을 버텼다는 설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순전히 스티센의 외형 덕분입니다.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얼마나 강해 보이느냐는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적을 압도하는 모습이 보여야 그 싸움을 지켜보는 재미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스티센은 바로 이 부분에서 꽤 강한 인상을 줍니다. 총격전보다는 몸을 직접 부딪히는 근접전이 많은데,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이 사람이 지금 싸우고 있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상대를 힘겹게 제압한다기보다 그냥 앞을 막는 사람들을 하나씩 치워버리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다만 그 강함이 역으로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적들이 여럿 몰려와도 "결국 존이 이기겠지"라는 확신이 너무 빨리 생기다 보니, "어떻게 이길까"를 보는 재미는 있지만 "이길 수 있을까"라는 조마조마함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이건 제가 영화를 보며 솔직히 아쉬웠던 지점이기도 합니다.
반면 존과 마리아의 관계에서 보이는 감정 변화는 예상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니라 '인간 백신(human vaccine)'으로, 혈액 속에 바이러스 항체를 가진 인물입니다. 즉 마리아의 생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치료제 개발 가능성과 연결됩니다. 존이 그녀를 지키기로 결심하는 순간, 그것이 단순한 동정심인지 삶의 이유를 다시 찾은 것인지 영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여백이 제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에서 가장 영리한 연출이었습니다.
《라스트 맨 다운》의 액션은 확실히 1980~90년대 원맨 액션 영화의 향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 해외 리뷰에서도 이 작품을 ‘throwback action film’으로 평가하면서 《람보》나 《코만도》 같은 작품을 연상시키는 액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잡한 전략이나 화려한 기술보다는 존이라는 한 사람이 압도적인 힘으로 적들을 하나씩 쓸어버리는 방식인데, 오히려 이런 투박함이 이 영화의 색깔처럼 느껴졌습니다.
결론
《라스트 맨 다운》을 완성도 높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관은 얇고, 인물의 감정은 빠르게 처리되며, 적들이 너무 약하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습니다. 제가 보면서도 그 아쉬움을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남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숲으로 숨어든 남자가 눈앞의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시 나서는 이야기. 거창한 사명도, 세상을 구하겠다는 각오도 없이 그냥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을 외면하지 못해서 싸우는 존의 모습이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투박한 액션 영화 한 편이 편하게 보고 싶은 날이 있다면, 특히 다니엘 스티센처럼 피지컬 하나로 화면을 압도하는 배우의 존재감을 좋아한다면, 이 영화가 그 자리를 충분히 채워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