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3일, 300명이 넘는 탈레반이 미군 53명이 지키던 키팅 전초기지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 전투를 다룬 영화 《아웃포스트》를 보고 나서 저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총격이나 폭발이 머릿속에 남은 게 아니라, 전투 전날 농담을 나누던 병사들의 얼굴이 더 오래 떠올랐습니다. 처음부터 쥐덫이었던 곳 — 전술적 취약성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겁니다. "왜 이 위치에 기지를 세운 걸까?" 카메라가 기지 주변을 훑는 순간,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고 적은 어디서든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보입니다.군사 전술에서 이런 위치를 '디파일(Defilade)'의 반대, 즉 '스카이라인 노출 지형'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스카이라인 노출이란 아군이 높은 지형에 올라선 적에게 완전히 ..
솔직히 저는 《다크랜드》를 처음 볼 때 그냥 시원한 복수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이 범인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예측 가능한 흐름이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떠오른 건 액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복수를 완성한 사람이 결국 어떤 얼굴로 남는가, 그 물음이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의사가 어둠으로 내려가기까지《다크랜드》의 출발점은 구조적으로 단순합니다. 성공한 심장외과 의사 자이드는 안정적인 직업과 임신한 아내,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삶이 있는 사람입니다. 범죄 세계와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인물이죠.그런데 동생 야신이 찾아옵니다. 범죄 조직에 얽혀 은행을 털고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야신은 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자이드는 거절합니다. 그리고 ..
퇴근하고 뭔가 틀어놓고 싶은데 무거운 영화는 싫고,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보기엔 너무 가벼운 것도 좀 그런 날이 있습니다. 제가 《필사의 추격》을 켠 건 딱 그런 날 밤이었습니다. 제목만 보고 꽤 진지한 추격 스릴러를 예상했는데, 첫 장면부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넷플릭스 공개 직후 한국 영화 시리즈 통합 순위 2위를 기록한 코믹 액션 영화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코믹 액션 장르가 살아나려면 캐릭터 설계가 먼저다《필사의 추격》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세 인물이 얽히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변장에 능한 사기꾼 김인해(박성웅),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형사 조수광(곽시양), 그리고 제주도에서 마약 유통 허브를 구축하려는 조직 보스 주린팡(윤경호)입니다.여기서 잠깐, 마약 유통 ..
보다가 중간에 잠깐 멈추고 "이거 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싶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베이 오브 사일런스》가 딱 그랬습니다.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사라진다는 설정만 보고 가볍게 틀었다가,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결국 끝까지 붙잡혀 버렸습니다. 단순한 실종 스릴러라고 부르기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것들이 좀 더 무겁습니다. 부부의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무엇이 남을까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불편함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낯선 사람에게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게 될 때 찾아오는 그 묘한 불편함이었습니다. 윌은 아내 로잘린드와 함께 이탈리아의 사일런스만에서 청혼을 하고, 그곳에서 결혼을 약속합니다.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 쌍둥이를 기다리고 있었습..
솔직히 저는 《리미트》를 보기 전까지 이정현이 '생활감 있는 경찰'을 연기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동 유괴를 소재로 한 범죄 스릴러라는 정보만 알고 들어갔다가,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절박한 감정에 끌려다녔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긴장감보다 답답함이 더 크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 영화의 진짜 힘이었습니다. 모성애가 범죄 수사를 집어삼킨 순간《리미트》는 아동 연쇄 유괴사건을 중심에 놓은 범죄 스릴러입니다. 생활안전과 경찰 소원은 피해자 엄마 연주의 현장 대역(Decoy Operation)으로 수사에 투입됩니다. 여기서 현장 대역이란 실제 피해자 가족 대신 경찰이 신분을 숨기고 범인과 직접 접촉하는 수사 기법을 말합니다. 소원에게는 과거 동일한 작전..
SF 영화는 대개 거대한 폭발과 영웅적인 전투로 기억에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기 전까지는요. 우주 한복판에서 혼자 눈을 뜬 남자의 이야기인데, 정작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전혀 다른 종족 둘이 서로의 언어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SF 블록버스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평가가 절반쯤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상실로 시작하는 이야기, 예상과 달랐던 도입부SF 영화의 도입부는 보통 거대한 위기를 바로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폭발이 터지거나, 적이 나타나거나, 긴박한 브리핑 장면으로 시작하죠. 제 경험상 그래서 첫 장면을 보면 영화의 톤이 대부분 예측이 됩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달랐습니다. 주인공 라이언드 그레이스는 차가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