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사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를 보면서 저는 그 질문을 계속 붙들게 됐습니다. 제목만 보면 살벌한 킬러 이야기를 예상하게 되지만, 막상 이 작품이 던지는 건 액션보다 훨씬 묵직한 것이었습니다. 친구 사이에서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가,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암살자의 정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설정주인공 쥴스는 파티장에서 타깃을 제거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후에는 자신을 '주디스 바튼'이라는 법의학 회계사로 소개하며 살아가는데, 여러 정보기관의 신분증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직업을 숨긴 정도가 아니라 이름부터 경력, 생활까지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이 비밀..
유럽 인구의 99%가 바이러스로 사망한 세계. 저는 이 설정을 보고 당연히 거대한 문명 붕괴 드라마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라스트 맨 다운》은 처음부터 그 기대를 조용히 무시합니다.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영화의 시선은 오직 한 남자의 오두막 앞마당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전부이면서, 동시에 의외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무너진 세계, 그런데 왜 카메라는 숲 속만 비추는 걸까요이 영화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의 내용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쉽게 말해 전쟁, 전염병, 재난 따위로 기존 사회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뒤 살아남은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매드 맥스》나 《더 로드》처럼 폐허가 된 세상을 광활하게 담아내는 작품들이 이 장르의 전형입니다. 그런데 《라스트 맨 다운..
솔직히 저는 《플래닛》을 틀기 전까지 러시아 재난 SF 영화를 제대로 기대한 적이 없었습니다. '러시아판 인터스텔라'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했거든요. 그런데 40분을 다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 운석도, 무너지는 도시도 아니었습니다. 우주에 있는 아버지가 지구에 있는 딸에게 어떻게든 닿으려 했던 그 마음이었습니다. 《플래닛》: 재난의 규모보다 더 크게 다가온 한 사람의 공포와 생존《플래닛》을 처음 접했을 때 예상했던 건 《2012》나 《투모로우》처럼 압도적인 파괴 장면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구성이었습니다. 소행성이 대기권에 진입하고, 도시가 통째로 무너지며, 인류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전형적인 재난 블록버스터 구조요. 실제로 영화 속에서 운석 파편이 쏟아지고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