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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사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내 친구는 암살자>를 보면서 저는 그 질문을 계속 붙들게 됐습니다. 제목만 보면 살벌한 킬러 이야기를 예상하게 되지만, 막상 이 작품이 던지는 건 액션보다 훨씬 묵직한 것이었습니다. 친구 사이에서 어디까지 솔직해야 하는가,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암살자의 정체,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설정
주인공 쥴스는 파티장에서 타깃을 제거하는 장면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이후에는 자신을 '주디스 바튼'이라는 법의학 회계사로 소개하며 살아가는데, 여러 정보기관의 신분증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직업을 숨긴 정도가 아니라 이름부터 경력, 생활까지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셈입니다.
제가 흥미롭게 본 건 이 비밀이 무려 20년 동안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데비가 알고 있던 쥴스의 모습 자체가 만들어진 삶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까지 다시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쥴스에게는 데비를 위험한 세계에서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데비가 스스로 선택할 기회까지 빼앗았습니다. 특히 데비의 뉴욕 법률 사무소 합격 이메일을 쥴스가 삭제했다는 사실은 그 모순을 잘 보여줍니다. 친구를 지키려던 행동이 오히려 친구의 인생을 대신 결정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쥴스는 단순한 냉정한 암살자라기보다, 보호와 통제 사이에서 선을 넘은 인물처럼 느껴졌습니다.
우정이라는 이름의 비대칭 관계
데비는 국회의원 남편에게 갑작스럽게 이혼 통보를 받은 데 이어, 20년 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가 암살자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됩니다. 믿었던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을 마주한 셈입니다.
제가 좋았던 건 데비의 반응이 지나치게 극적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충격을 받고 화를 내면서도 쥴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습니다. 배신감과 걱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20년을 함께한 친구라면 '나를 속였어'라는 생각만으로 관계를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쥴스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동안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까지 전부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쥴스가 데비의 인생을 대신 결정했다는 점이 두 사람의 갈등을 더 크게 만듭니다. 쥴스는 데비를 보호한다고 생각했지만, 데비 입장에서는 자신의 선택권을 빼앗긴 겁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저는 좋은 뜻으로 한 행동이라고 해서 상대에게도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누가 옳은지를 따지는 것보다,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고도 다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긴장감의 구조 — 작동하는 것과 아쉬운 것
영화 초반부는 꽤 긴장감 있게 흘러갑니다. 빌리의 방에서 시체들을 발견하는 장면부터 감시 카메라를 피해 침투하는 과정, 독살 시도가 실패한 뒤 다른 방법을 찾아가는 장면까지 이어지면서 쥴스가 얼마나 노련한 인물인지 보여줍니다.
저는 특히 쥴스가 계획이 틀어졌을 때 당황하기보다 바로 다음 방법을 찾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실패했다고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맞춰 계속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게 잘 느껴졌습니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의 집중력이 조금 떨어지는 건 아쉬웠습니다. 레드백이 등장하면서 사건의 규모는 커지지만 예술품 강탈, 제네바 은행, 기차 추격전 등이 이어지면서 각각의 장면이 따로 노는 듯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액션을 조금 줄이고 쥴스와 데비의 관계를 더 깊게 보여줬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액션 자체가 재미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궁금했던 건 '쥴스가 과연 데비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그래서 후반부의 화려한 장면을 보면서도 '이 장면 대신 두 사람 이야기를 조금 더 보여줬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결론
<내 친구는 암살자>는 제목만 보면 암살과 첩보 액션이 중심인 영화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총격전과 추격전도 등장하고 쥴스 역시 상당히 능숙한 암살자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그런 장면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쥴스보다 데비가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20년 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도, 그동안의 시간을 쉽게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된다면 처음에는 분명 화가 날 것 같습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지?'라는 생각도 들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에게 좋은 친구였던 시간까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습니다.
결국 이 영화가 제게 남긴 건 단순한 암살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오래 알고 지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전부를 알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 관계를 다시 선택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믿었던 사람의 전혀 다른 모습을 마주했을 때, 그래도 그 사람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저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질문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