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한 영화 《온딘》은 아일랜드 어부가 그물에서 건져 올린 정체불명의 여자를 셀키, 즉 바다표범이 인간으로 변한 존재로 오해하면서 시작됩니다. 처음 이 설정을 들었을 때 솔직히 좀 황당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제가 틀렸습니다. 셀키 전설과 아일랜드 바다 — 이 영화가 판타지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일반적으로 켈트 신화 기반의 판타지 영화라고 하면 화려한 특수효과와 명확한 세계관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런데 《온딘》은 다릅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봤을 때 화면 어디에도 판타지임을 확실히 못 박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그게 오히려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여기서 셀키(Selkie)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켈트 민간 설화에 등장하는 존재로, 바다에서는 바다표범의 모습으로 살다가 육지에서는 ..
2015년 개봉, 제68회 칸 국제 영화제 공식 초청. 숫자만 보면 그냥 수작 한 편이려니 했는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기분 좋은 여운이 아니라 뭔가 찝찝하게 남는 감각. 그게 오히려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버려진 아이와 차이나타운이라는 세계영화는 지하철 보관함 10번에서 시작합니다. 이름조차 그 번호에서 따온 '일영'이라는 아이. 태어나자마자 선택권이 없었던 사람이 흘러들어 간 곳이 차이나타운이고, 그 안에서 배운 생존의 언어는 딱 하나였습니다.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여기서 '누아르(Noir)'라는 장르 개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누아르란 어둡고 비관적인 세계관 속에서 도덕적으로 모호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뜻합니다. 주로 범죄, 폭력, 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검객 영화라고 해서 화려한 칼싸움을 기대하고 틀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칼이 아니라 사람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황정민, 차승원, 백성현. 세 사람이 한 화면 안에서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감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임진왜란 직전 혼란한 조선을 배경으로, 맹인 검객과 그를 따르는 서자가 역적 이몽학을 쫓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꿈과 욕망이 어디서 갈라지는지를 묻는 영화입니다. 맹인 검객과 이몽학, 같은 출발점에서 갈라진 두 사람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했던 건 황정학과 이몽학이 원래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은 대동계(大同契)를 함께 만든 동료였습니다. 대동계란 조..
리암 니슨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켰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총격전이 아니라 다른 질문이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내려놓는 것과 총을 내려놓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블랙라이트》는 그 질문을 액션 스릴러의 형식 안에 조용히 밀어 넣은 영화입니다. FBI 내부 음모, 익숙하지만 트래비스 블록이라는 인물이 다르다리암 니슨이 나오는 액션 영화에서 정부 기관 내부의 음모가 등장하는 건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영화를 보면서 계속 신경이 쓰였던 건 소재 자체가 아니라 트래비스 블록이라는 캐릭터였습니다.트래비스는 FBI의 비공식 요원(off-the-books operative)입니다. 여기서 비공식 요원이란 조직 내 공식 명부에 이름을..
솔직히 처음엔 그냥 재난 SF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게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그 자체가 저주일까. 《노잉》은 1959년 한 초등학생이 타임캡슐에 넣은 숫자들이 50년 뒤 실제 재난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겉으론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보고 나면 꽤 오래 마음에 걸리는 작품입니다. 숫자 예언과 결정론,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뺏긴 건 숫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숫자를 발견한 존 코슬러가 처음에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MIT 천체물리학 교수로,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장의 종이 앞에서 점점 흔들리는 모습이..
출근길 자동차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폭발한다. 《레트리뷰션》(2023)은 이 단 하나의 설정을 90분 동안 밀어붙이는 영화입니다. 처음 이 설정을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걸로 90분을 어떻게 끌어가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나니, 단순한 설정이 오히려 영화의 가장 강한 무기였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밀실 스릴러의 구조 — 자동차 한 대가 감옥이 되는 방식《레트리뷰션》은 장르적으로 '밀실 스릴러(Confined Space Thriller)'에 속합니다. 밀실 스릴러란 주인공이 극도로 제한된 공간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구조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장르를 말합니다. 같은 방식을 쓴 작품으로 《베리드》(2010)나 《로크》(2013)가 있는데, 두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