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엔 그냥 재난 SF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미래를 미리 안다는 게 과연 축복일까, 아니면 그 자체가 저주일까. 《노잉》은 1959년 한 초등학생이 타임캡슐에 넣은 숫자들이 50년 뒤 실제 재난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시작되는 영화입니다. 겉으론 미스터리 스릴러처럼 보이지만, 보고 나면 꽤 오래 마음에 걸리는 작품입니다. 숫자 예언과 결정론, 이 영화가 던지는 진짜 질문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뺏긴 건 숫자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숫자를 발견한 존 코슬러가 처음에 보이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MIT 천체물리학 교수로,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장의 종이 앞에서 점점 흔들리는 모습이..
SF 영화는 대개 거대한 폭발과 영웅적인 전투로 기억에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기 전까지는요. 우주 한복판에서 혼자 눈을 뜬 남자의 이야기인데, 정작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전혀 다른 종족 둘이 서로의 언어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한 SF 블록버스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평가가 절반쯤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상실로 시작하는 이야기, 예상과 달랐던 도입부SF 영화의 도입부는 보통 거대한 위기를 바로 보여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폭발이 터지거나, 적이 나타나거나, 긴박한 브리핑 장면으로 시작하죠. 제 경험상 그래서 첫 장면을 보면 영화의 톤이 대부분 예측이 됩니다. 그런데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달랐습니다. 주인공 라이언드 그레이스는 차가운..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존 카터》를 처음 틀었을 때만 해도 그냥 망한 블록버스터 하나 때우는 기분이었는데, 다 보고 나니 머릿속에서 이상하게 자꾸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1912년에 쓰인 소설이 원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SF 설정의 뿌리 같은 작품이 이렇게 늦게 도착했다는 게 묘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고전 SF의 원형, 바르숨이라는 세계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였습니다. 공주를 둘러싼 두 세력의 전쟁, 다른 행성으로 넘어간 지구인 영웅, 원주민 부족과의 동맹.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이야기가 만들어진 건 《스타워즈》보다도, 《아바타》보다도 훨씬 앞선 시대입니다.원작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Edga..
솔직히 저는 《레플리카》를 그냥 키아누 리브스 나오는 SF 액션물 정도로 알고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화면에서 눈을 뗀 뒤에도 계속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거든요. 죽은 사람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저는 그 사람이 돌아왔다고 믿을 수 있을까. 복제인간 기술이 실제로 가능할까 — 영화 속 설정과 현실 사이일반적으로 복제인간 하면 외모가 똑같은 사람을 만드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레플리카》의 설정은 그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영화 속 윌 포스터가 연구하는 기술의 핵심은 의식 이식(Consciousness Transfer)입니다. 여기서 의식 이식이란 한 사람의 기억, 감정, 자아 전체를 디지털 신호로 변환한 뒤 인..
힘든 일이 생기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넘길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언젠간 달라질 거야》를 보고 나서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습니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빌렸지만, 결국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정말 인생이 달라질까. 시간루프 구조, 알고 보면 더 씁쓸하다일반적으로 타임루프(time loop) 영화라고 하면 주인공이 과거를 반복하면서 점점 더 나은 선택을 하고 결국 최선의 결말에 도달한다는 공식을 따릅니다. 제가 이 장르 영화를 꽤 챙겨 봐 온 편인데, 그 공식이 거의 불문율처럼 작동해 왔습니다.그런데 《언젠간 달라질 거야》는 그 공식을 뒤집습니다. 조셉과 시드니 남매는 강도 사건 이후 경찰을 피해 숨어든 집에서 타임라인(time..
가상현실 속 존재에게도 인권이 있을까요? 영화 《레벨스》는 이 질문을 꽤 진지하게 던집니다.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남자 조가 연인 애쉬의 죽음을 목격한 뒤, 자신이 살아온 세상 자체가 대기업이 만들어 운영하는 시뮬레이션(simulation)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첫 생각은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도 누군가 설계한 반응일까?"였습니다. 가상현실 설정의 팩트 — 센텍과 센프 프로젝트《레벨스》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대기업 센텍(Centec)의 천재 개발자 앤서니 헌터가 정부의 금지를 어기고 센프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이어갑니다. 여기서 센프 프로젝트란 완전한 가상현실 공간을 구축해 그 안에서 신기술·무기·신약 등을 실험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쉽게 말해 현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