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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룡 (견자단, 홍콩 느와르, 의리와욕망)

와인마신곰탱이 2026. 9. 11. 07:44

목차


    솔직히 저는 《추룡》을 보기 전까지 견자단이 악역을 연기하는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액션 히어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였는지, 그가 암흑가의 보스 역할을 맡았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막상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오히려 이 작품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홍콩 느와르(noir), 즉 부패와 폭력이 뒤섞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범죄 장르 영화라는 점도 보고 나서야 실감이 났습니다.

     

    견자단이 연기한 오세오, 악인이 만들어지는 과정

    《추룡》의 배경은 1974년 이전의 홍콩입니다. 이 시기는 홍콩 역사에서 '암흑기'로 불리는 시대로, 경찰 조직 내 구조적 부패(structural corruption)가 일상화되어 있었습니다. 구조적 부패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비리와 결탁한 상태를 말합니다. 실제로 홍콩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4년 염정공서(ICAC, Independent Commission Against Corruption)를 설립했습니다. ICAC란 공무원의 부패를 독립적으로 수사하는 기관으로, 설립 이후 홍콩 사회의 투명성을 크게 높인 것으로 평가받습니다(출처: 홍콩 염정공서(ICAC) 공식 사이트).

     

    영화 속 오세오는 이런 시대에 맨주먹 하나로 홍콩에 발을 들인 인물입니다. 제가 이 캐릭터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오세오는 생존을 위해 가장 직접적인 방법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쌓이면서 점점 더 폭력의 구조 안에 깊이 들어갑니다.

     

    그가 구룡성채(Kowloon Walled City)에 입성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구룡성채란 홍콩에 실재했던 무법지대 성격의 밀집 거주 지역으로, 경찰 공권력이 사실상 미치지 않았던 곳입니다. 오세오는 이곳에서 살인과 폭행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집니다. 이 과정이 성공담처럼 보이다가도, 동시에 한 사람이 점점 더 본래의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오세오의 아내와 아들이 해양 경찰 단속 중 바닷속으로 수장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비극은 오세오가 걸어온 삶이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화려한 연출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게 오히려 더 오래 남았습니다.

     

    홍콩 느와르의 귀환, 《추룡》이 다시 꺼내든 의리와 욕망

    《추룡》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때 홍콩 영화를 대표했던 홍콩 느와르의 분위기였습니다. 총과 폭력, 조직과 경찰,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의리와 배신까지. 《추룡》은 익숙한 홍콩 느와르의 문법을 현대적인 화면으로 다시 꺼내든 작품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오세호와 뢰락이라는 두 남자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암흑가에서 주먹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경찰 조직 안에서 권력을 손에 넣습니다. 원래라면 서로 적이 되어야 할 두 사람이지만, 영화는 오히려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서 만들어지는 거대한 권력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이 관계가 《추룡》의 가장 홍콩 느와르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홍콩 느와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단순한 선악 구분보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와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오세호와 뢰락 역시 완전히 선한 인물은 아닙니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서로를 믿고 함께 위기를 헤쳐가는 순간에는 묘한 인간적인 감정이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추룡》이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영화는 두 사람의 성공을 화려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권력과 돈이 커질수록 처음의 관계가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보여줍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는 의리 하나로 함께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뒤에는 그 의리를 지키는 일이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견자단의 거칠고 직선적인 에너지와 유덕화의 여유 있으면서도 계산적인 연기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두 배우가 함께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추룡》은 단순한 범죄 영화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결국 《추룡》은 새로운 형식의 범죄 영화라기보다, 홍콩 느와르가 사랑받았던 이유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화려한 총격과 액션도 있지만, 영화가 끝난 뒤 더 오래 남는 것은 결국 권력보다 의리를 먼저 믿었던 두 남자가 욕망 앞에서 어떻게 변해가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유덕화의 뢰락, 의리와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

    《추룡》에서 유덕화가 연기하는 뢰락은 경찰이라는 제도권(institutional power) 안에서 권력을 만들어가는 인물입니다. 제도권이란 법과 공식 조직이 부여하는 권한 구조를 의미합니다. 오세오가 주먹으로 암흑가를 움직인다면, 뢰락은 제도 안에서 인맥과 정치적 계산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넓힙니다. 장관의 사위가 되면서 홍콩에서 누구도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오르는 장면은, 그가 단순한 경찰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가 되어가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제 경험상 이런 유형의 캐릭터는 오히려 순수한 악당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뢰락은 직접 주먹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재편하고,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일을 누군가에게 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그가 내리는 결정 하나하나가 오세오의 삶과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의형제(sworn brotherhood)를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의형제란 혈연이 아닌 의리와 신뢰를 기반으로 형제 관계를 맹세하는 홍콩·중국 문화권의 전통적 결속 방식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연결고리로 처음 안면을 텄고, 이후 서로의 힘이 필요한 순간마다 그 결속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그 의리를 지키는 일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두 남자가 함께 정상에 오르는 통쾌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후반부로 갈수록, 두 사람이 서로를 믿는 이유가 정말 상대방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대방이 가진 힘이 아직 필요하기 때문인지 경계가 흐려지면서 묘한 긴장감이 생깁니다. 홍콩 정부가 부패 감시 위원회를 신설하고 공무원 색출에 나서는 시점에서 두 사람의 균열은 더 가속화됩니다(출처: ICAC 설립 역사).

     

    뢰락이 끝까지 오세오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그를 정당방위로 덮어주어 사형만은 면하게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이것이 의리인지 아니면 자신이 져야 할 빚을 마지막으로 청산하는 것인지 한동안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제 경우엔 그 장면을 두 번 다시 봤는데도 여전히 결론이 쉽게 나지 않더군요.

     

    결론

    《추룡》을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통쾌함이 아니라 씁쓸함이었습니다. 두 남자는 분명히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성공의 크기보다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의리 하나로 묶였던 관계가,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뒤에는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온전히 유지되기 어려워지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홍콩 느와르 장르를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좋은 입문작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화려한 액션만을 기대하고 보면 후반부의 감정적 무게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방법은 영화를 보기 전에 1974년 홍콩 염정공서 설립 배경을 간단히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 맥락을 알고 보면 뢰락이라는 인물이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 훨씬 입체적으로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