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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때문에 군대에 간 남자가 왜 은행을 털게 됐을까요. 《체리》를 처음 틀었을 때 저도 그 연결 고리가 쉽게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남짓을 따라가고 나니, 이 영화가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한 청년이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무너지는 과정을 담은 기록이었습니다.

추락 서사 — 악인이 아닌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는가
《체리》는 니코 워커의 자전적 실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플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루소 형제가 연출을 맡았고, 톰 홀랜드가 주인공 체리를 연기하기 위해 13kg을 감량했습니다. 영화 제목 '체리(cherry)'는 전쟁터에 막 투입된 풋내기 신병을 뜻하는 군대 은어입니다. 주인공에게 고유한 이름이 없는 것도 의도적 설계로, 그가 겪은 비극이 특정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비극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체리의 이야기는 대학 캠퍼스에서 에밀리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어설프고 풋풋한 청춘 로맨스처럼 출발하는 이 영화가, 이라크 전쟁과 은행 강도로 흘러간다는 것을 처음에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도 그것이었습니다. 체리는 처음부터 위험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에밀리와의 이별에 충격을 받은 체리는 충동적으로 군에 자원입대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균열입니다. 이후 이라크 전쟁에 의무병으로 투입되어 전우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하고, 함께 배치된 친구 히메네스까지 폭발 사고로 잃습니다. 전역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몸만 돌아왔을 뿐 마음은 여전히 전쟁터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에 따르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군인의 약 11~20%가 귀환 후 PTSD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됩니다. 체리가 사소한 자극에 분노를 터뜨리고, 잠을 못 이루며, 결국 약물에 손을 뻗는 과정은 바로 그 통계 안에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과정에서 가장 무겁게 받아들인 것은, 체리가 매 단계에서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오늘 하루만 버티기 위해, 지금 이 고통만 잠시 잊기 위해 선택한 것들이 쌓이면서 결국 그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악인이 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처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도망치다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PTSD·약물 중독 —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은 체리가 귀환 직후 상담 의사를 찾아가는 장면이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갔는데, 의사는 오히려 오피오이드 계열 처방을 내립니다. 오피오이드(opioid)란 모르핀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진통·마취 계열 약물로, 강력한 통증 완화 효과를 지니지만 반복 사용 시 신체 의존성과 내성이 빠르게 형성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오피오이드 과다처방이 사회적 위기로 번진 바 있으며, 출처: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이를 '오피오이드 에피데믹(opioid epidemic)', 즉 의약품 남용이 사회 전체로 확산된 유행병 수준의 위기로 규정합니다. 체리의 이야기는 바로 그 에피데믹의 한 단면입니다.
에밀리 역시 체리와 함께 무너져갑니다. 처음에는 체리를 걱정하고 어떻게든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국 체리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서로를 너무 걱정하고, 서로를 혼자 두지 못하다 보니 결국 같은 곳으로 내려가고 맙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참 답답합니다. 체리는 에밀리를 지켜주겠다며 점점 더 위험한 일을 벌이고, 에밀리는 그런 체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못합니다. 한 사람이 무너지면 다른 사람이 붙잡아줘야 할 것 같은데, 이 둘은 서로를 붙잡기는커녕 같이 끌려 내려갑니다.
톰 홀랜드의 연기도 이 과정에서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의 체리는 조금 어설프고 철없는 청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눈빛부터 달라집니다. 말투도 거칠어지고 행동도 점점 충동적으로 변합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그 변화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저 역시 체리가 어디까지 변했는지 한참 뒤에야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톰 홀랜드가 그 모습을 멋있게 포장하지 않았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약물에 빠진 사람을 영화적인 카리스마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점점 망가지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히려 보는 게 불편했습니다. 은행을 터는 장면도 비슷했습니다. 보통 은행 강도 영화라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기면서 긴장감이 올라갑니다. 그런데 체리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그냥 당장 약을 살 돈이 필요해서 은행을 터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손에 넣는 순간에도 통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 약을 살 시간을 조금 더 번 것뿐이니까요. 이 부분을 보면서 체리의 삶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전쟁에서 돌아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청년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버티기 위해 약이 필요하고, 약을 구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에밀리 역시 그 과정에서 함께 무너집니다. 사랑이 두 사람을 구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사랑 때문에 서로를 놓지 못하면서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 저는 그 모습이 《체리》에서 가장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결론
《체리》를 다 보고 난 뒤 제게 가장 오래 남은 건 통쾌함도, 비장함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한 청년이 마지막에는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씁쓸함이었습니다. 더 마음이 무거웠던 건 체리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힘들다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했고, 자신의 고통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피하고 또 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돌아가기 힘든 곳까지 와버린 겁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걸 포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이번 한 번만 괜찮겠지' 하면서 넘어가다 보면 그 선택이 어느새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영화를 보면서 무서웠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특별히 나약한 사람이어서 무너지는 게 아니라, 힘든 순간에 어떤 선택을 반복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체리》는 단순히 약물이나 전쟁 후유증을 다룬 영화로만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한 한 사람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톰 홀랜드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싶은 분이나, 조금 무겁더라도 인물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볼 만합니다. 다만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저 역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바로 다른 영화를 틀기보다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보고 나면 재미있었다는 말보다 '참 씁쓸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