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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트 리뷰 (기억, 불멸, 정체성)

와인마신곰탱이 2026. 9. 9. 11:07

목차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인피니트》를 처음 틀었을 때 저는 그냥 마크 월버그 나오는 무난한 SF 액션 정도로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게 정말 축복일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설정은 흥미로웠고, 그 질문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전생 기억이라는 설정, 생각보다 무거웠습니다

    일반적으로 환생(reincarnation)이라는 소재는 가볍고 판타지적인 방식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환생이란 죽은 뒤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개념을 말하는데, 대부분의 이야기에서는 이전 삶의 기억이 사라지는 방향으로 처리합니다. 백지상태로 새 삶을 시작하는 거죠.

     

    그런데 《인피니트》는 달랐습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죽어도 기억을 잃지 않습니다. 인피니트(Infinite)라고 불리는 이들은 환생 후에도 이전 삶에서 익혔던 기술, 언어, 관계를 그대로 이어갑니다. 주인공 에반은 배운 적 없는 도예 기술을 자연스럽게 구사하고, 처음 보는 장소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반응합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들을 보면서 느낀 건 "저게 신기하다"가 아니라 "저게 얼마나 무거울까"였습니다.

     

    전생의 트라우마(trauma), 즉 과거의 심리적 상처가 그대로 다음 삶까지 이어진다는 점이 특히 그랬습니다. 트라우마란 특정 사건으로 인해 생긴 심리적 충격이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말하는데, 에반의 경우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게 사실은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집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는 단순한 액션 영화에서 잘 쓰지 않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두 집단의 대립입니다. 기억을 이어가며 세상을 지키려는 빌리버(Believer)와, 끝없는 삶 자체를 멈추려는 배서스트(Bathurst) 측의 갈등인데요. 저는 처음에 당연히 빌리버가 선하고 배서스트가 악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배서스트가 수십 번의 환생을 거친 뒤 이 능력을 저주로 여기게 됐다는 배경을 듣고 나서는 그 판단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반추(rumination)라고 표현합니다. 반추란 부정적인 기억이나 감정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벗어나지 못하는 인지 패턴인데, 기억을 완전히 보존한 채 수백 번을 산다면 그 반추가 문자 그대로 수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셈입니다. 그게 과연 살아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 속에 갇힌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습니다.

     

    영화가 이 부분을 좀 더 깊게 팠다면 훨씬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후반부로 갈수록 추격전과 전투 장면이 중심을 차지합니다. 그게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쉬운 지점이었습니다. 좋은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찾기 전에 다음 액션 시퀀스로 넘어가는 느낌이었거든요.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반추 성향이 강할수록 우울과 불안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는데(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기억을 끊을 수 없는 인피니트들이 왜 결국 그 능력을 저주로 여기게 되는지 이 맥락에서 보면 훨씬 납득이 갑니다.

     

    《인피니트》불멸 :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나는 나인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몸이 바뀌고 이름이 바뀌어도, 기억이 그대로라면 그 사람은 여전히 같은 사람인가.

     

    철학에서는 이를 개인 동일성(personal identity)이라고 부릅니다. 개인 동일성이란 시간의 흐름과 신체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묻는 개념입니다. 존 로크(John Locke)는 기억의 연속성이 그 핵심이라고 봤는데, 그 기준을 따르면 인피니트들은 몸이 바뀌어도 기억이 이어지는 한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출처: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그런데 저는 이 지점에서 영화 속 에반을 보면서 좀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억의 연속이 꼭 동일한 자아의 연속을 보장할까요. 에반은 수십 번의 삶을 살면서 이전의 관계를 이어가고, 오래 전의 목표를 다시 완수하려 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삶을 계속 이어가는 구조입니다. 저는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꽤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더 잘할 텐데"라고 말합니다. 제가 직접 그런 생각을 해봤는데, 막상 모든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과거를 고치기보다 과거에 더 깊이 붙잡힐 것 같았습니다. 이전 삶에서 놓쳤던 관계, 실패했던 선택, 후회스러운 순간들이 새 삶에서도 그대로 따라온다면 그건 새 시작이 아니라 연장이니까요.

     

    배서스트라는 악역이 그렇게 읽혔습니다. 그는 세상을 파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끝나지 않는 이 루프(loop) 자체를 멈추고 싶었던 겁니다. 루프란 같은 과정이 반복되는 구조를 뜻하는데, 죽어도 다시 돌아오는 삶은 어떻게 보면 탈출구가 없는 루프입니다. 그 감정 자체가 무조건 악하다고 단정하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악역은 단순히 나쁜 짓을 하는 인물보다 훨씬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배서스트의 내면이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려졌다면, 이 영화는 SF 액션이 아니라 꽤 깊이 있는 존재론적 드라마로 기억됐을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정체성 : 기억이 나를 만드는가, 몸이 나를 만드는가

    《인피니트》를 보면서 가장 흥미롭게 느껴졌던 부분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영화 속 인피니트들은 죽은 뒤 전혀 다른 모습과 다른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지만, 어느 순간 이전 삶의 기억을 되찾습니다. 몸도 바뀌고 살아가는 환경도 달라지지만 기억은 이어지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 그 사람은 과연 새로운 인물일까, 아니면 과거의 삶을 그대로 이어가는 같은 사람일까. 개인적으로 이 설정은 생각보다 복잡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름과 얼굴, 현재의 모습으로 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은 외형이 완전히 달라져도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과거에 배웠던 기술을 사용하며, 이전 삶에서 맺었던 관계를 이어갑니다.

     

    결국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몸이 아니라 기억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질문도 남습니다. 만약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반대로 몸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과거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이전의 인물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피니트》는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지만, 관객에게 정체성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영화를 보며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결국 지금의 나 역시 수많은 기억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이었습니다. 좋은 기억뿐 아니라 후회했던 순간과 상처받았던 경험까지 모두 쌓여 지금의 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기억을 이어가며 다시 태어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과거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람들 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인피니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몇 번을 다시 살아나는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바뀐 뒤에도 끝까지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결론

    《인피니트》를 보고 난 뒤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 영화는 불멸이나 환생을 동경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를 전부 기억한 채 다시 살 수 있다면, 그게 정말 새로운 시작일까?"라는 질문을 조용히 던지는 영화입니다.

     

    개인 동일성, 반추, 트라우마처럼 영화 속에 숨어있는 개념들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SF 액션 이상의 여운이 남습니다. 다만 그 여운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액션으로 마무리했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습니다. 복잡한 철학보다 시각적 쾌감을 원하는 분들께는 잘 맞는 영화고, 저처럼 설정의 깊이를 기대하는 분들께는 조금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영화 자체보다 이 리뷰를 읽으면서 "나는 지금의 기억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한 번쯤 생각해 보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한 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