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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브랜드뉴데이 (고독, 변이, 각성)

와인마신곰탱이 2026. 8. 20. 22:53

목차


     우리가 아는 스파이더맨 영화라고 하면 보통 통쾌한 액션과 재치있는 유머, 그리고 청춘의 설렘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르는데,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는 높은 빌딩숲 위에 혼자 있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혼자 남겨진 피터 파커를 보면서, 저는 히어로 영화를 보고 있다는 감각보다 어떤 청년의 고립 일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습니다.

     

    4년의 고독이 몸에 새겨진다는 것

    일반적으로 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의 감정은 대사나 표정으로 설명됩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달랐습니다. 피터의 고독은 말이 아니라 몸의 변화로 드러납니다. 처음엔 "거미 유전자 변이"라는 설정이 다소 억지라고 느껴졌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오히려 이 선택이 가장 와닿는 표현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터는 노 웨이 홈(No Way Home) 이후 MJ도, 네드도, 메이 숙모도 없는 채로 4년을 버팁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느껴지니까, 밤새 빌런을 잡으며 일로 도피하는 거죠. 힘겹게 버티던 와중에 우연히 만나 네드를 따라가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MJ를 보게 됩니다. 그 결과 웹슈터(Web-Shooter) 없이도 손목에서 거미줄이 뿜어져 나오고, 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에도 머리가 쪼개질 듯한 감각 과부하가 찾아옵니다. 다른 남자랑 키스하는 MJ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피터가 직접 울거나 절망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이 오히려 가장 아프게 느껴집니다. 언제 가는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희망이 무너지고, 그 절망이 몸의 변화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방 전체가 거미줄로 뒤덮여 있고 고치(Cocoon) 안에 거꾸로 매달린 채 발견됩니다. 이 장면은 피터가 인간과 거미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로 쓰인 거로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이것이 단순히 능력 업그레이드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느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붙들어 두던 것들, 즉 누군가의 잔소리와 데이트, 레고 조립 같은 시시한 일상들이 사라지자 그 빈자리를 거미의 본능이 채우고 있는 거였습니다.

     

    원작 코믹스 《The Other》 아크에서도 피터는 허물을 벗고 새로운 능력을 얻는 과정을 거칩니다. 실사 MCU에서 이 설정을 처음 도입한 것인데,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확인한 것은 이 변이가 갑작스럽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4년이라는 고립의 시간이 충분히 쌓인 상태에서 정신적인 충격에 몸이 반응했고, 그래서 오히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변이를 다루는 방식, 브루스 배너와 진 그레이의 합류

    처음에 "왜 하필 브루스 배너냐"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원작 팬들이라면 이 자리가 커트 코너스(Curt Connors) 박사 자리라는 걸 바로 알아채죠. 피터가 유전자 문제로 대학 교수를 찾아가고, 그 교수가 결국 초록 괴물이 된다는 공식 루트.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헐크(Hulk)를 배치합니다. 경험상 이런 장르적 비틀기는 대개 실망스럽게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대학 물리학 교수로 조용히 강의 중인 배너를 보는 순간, 그 긴장감이 코믹하면서도 묘하게 무거웠습니다. 배너는 헐크로의 변신을 인위적으로 막아주는 장치를 직접 개발해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거미유전자 중 좋은 부분만을 남기고 나쁜 부분을 억제하려는 피터에게 브루스가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누가 정합니까?" 배너 입장에서는 평생 짊어온 질문을 역으로 돌려준 셈이고, 이 짧은 대화 하나에 영화 전체의 주제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진 그레이(Jean Grey)의 경우는 더 인상적입니다. 엑스맨(X-Men) 창단 멤버 다섯 명 중 한 명인 진 그레이는 기본적으로 텔레파시와 염력(Telekinesis)을 구사합니다. 진 그레이는 이를 "마인드 점프(Mind Jump)"라는 방식으로 응용해서 타인의 정신 속을 넘나들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헐크, MJ 등 여러 인물의 의식을 지배하며 결국 통제 불가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빌런으로 그려진 줄 알았는데 영화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진 그레이를 빌런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목적은 언니 세라를 찾는 것이었고, 세라 역시 능력자로 대미지 컨트롤(D.O.D.C.)이라는 초능력자 관련 사건을 처리하는 기관에 납치되어 실험 대상이 됐던 피해자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는 위험하니 가둬야 한다"는 논리가 선한 사람을 어떻게 피해자로 만드는지 보여주는데, 이런 전형적인 엑스맨 테마를 스파이더맨 단독 영화 안에 이 서사를 이식했다는 것에, 저는 꽤 대담한 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피터의 각성, 그리고 "난 둘 다"라는 답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폭주한 진 그레이가 조종하는 핸드(The Hand)와의 클라이맥스 전투신이었습니다. 진은 피터에게 묻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사치다. 더 이상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니 진실을 받아들여라. 넌 둘 중 누구냐?" 그리고 피터의 대답은 딱 세 글자입니다. "난 둘 다."

     

    이 순간부터 초각성(Hyper-Awakening) 상태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상태에서 피터가 핸드 조직원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선택을 정확히 유지한다는 겁니다. 처음 각성했을 때처럼 통제를 잃고 폭주하는 게 아니라, 거미와 인간이 동시에 공존하는 상태로 움직입니다. 슬로모션으로 흘러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제가 느낀 것은 "이 감독이 피터에게 주려 했던 게 이거였구나"였습니다.

     

    퍼니셔와의 관계도 이번 영화에서 제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퍼니셔(Punisher)는 복면 쓴 히어로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4년 동안 피터가 그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줬다는 배경이 깔리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프랭크 캐슬이 눈물을 보이며 "용감한 사람은 많이 봤지만 너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번엔 그 4년간의 복선 덕분에 자연스럽게 납득이 됐습니다.

     

    또 한 가지, 영화의 엔딩에서 네드가 피터와의 핸드 사인을 무의식적으로 이어받는 장면. 기억은 지워졌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MJ 역시 피터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억제칩을 고쳐줍니다. "기억은 지워져도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이 영화가 끝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남은 질문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제가 옳다고 믿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결론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를 보고 나서 제가 내린 평가는 "완벽한 영화"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영화"입니다. 진 그레이, 헐크, 퍼니셔가 동시에 들어오면서 서사 밀도가 높아진 만큼, 일부 아이디어는 충분히 깊이 발전되지 못한 채 다음 작품의 세팅으로 빠져나갑니다. 한두 개의 서브플롯만 덜어냈다면 오히려 훨씬 강력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의미 있는 이유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를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옳은 일을 할 것인가. 그 질문에 피터는 행동으로 답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둠스데이와 시크릿 워즈에서 피터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 기대해 보시고, 진 그레이가 MCU 엑스맨 서사를 어떻게 열어갈지도 함께 주목해 볼 만합니다.